
현대인의 고립을 화폭에 담아내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뉴욕의 방(Room in New York)> 은 1932년 작품이다. 부부가 거실에 함께 있지만 남자는 신문을 보고, 여자는 피아노 앞에 앉아 생각에 골몰해 있다. 같이 있지만 서로를 친애하지 않는 듯한 두 사람.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함께 나눈 세월이 지날수록 깊은 맛을 내는 와인처럼 서로의 시간을 존중해 준다면 자연스러운 편안함과 친밀함을 화폭에 담을 수 있을 텐데 과연 그런 광경은 드라마의 잘 포장된 한 장면에 불과한 것인지. 호퍼의 작품처럼 서로에게 무덤덤해지며 어느 순간부터 서로에게 말을 걸지 않게 되는 부부, 상대의 하루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게 되어 같은 집 안에서도 각자의 시간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차차로 멀어지는 계기'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부부가 함께 살면서도 낯선 사람이 되는 순간
2025년 우리나라 이혼은 약 8만 8천 건이었다. 전체 이혼 건수는 6년 연속 감소했지만, 혼인 기간 30년 이상 부부의 이혼이 전체의 17.7%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2024년 기준, 남성의 이혼율은 40대 후반, 여성은 40대 초반에 가장 높았는데 평균 이혼 연령은 2025년에는 각각 51.0세와 47.7세로 높아진 것이다. 이 통계는 단순히 '이혼이 늘었다'라기 보다 '오래된 관계의 상'을 다시 질문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오랜 세월, 희로애락을 함께 한 부부가 삶의 중반부에 이르러 서로의 관계 철회를 결정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윤리적으로 명백한 사유. 외도, 도박, 중독 등의 사유도 있다. 그러나 그런 귀책이 없는데도 헤어짐을 결정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를 무감하게, 투명 인간 취급하는 태도는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깊은 생채기를 낸다. 모든 부부의 이혼 사유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문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 곪을 대로 곪은 '권태감'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며 관계를 도려내는 결정을 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두 사람 관계의 시발점에서 상호 소통이 잘되던 유대감은 왜 삐걱거리게 된 것일까?
오래 함께 살면서 우리는 상대를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야말로 무엇이든 예측 가능한 그와 그녀에게는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는 '오해'가 어느 순간 서로에 대한 낯섦으로 다가온다.

심리학자 모니크 폴만과 카트린 핑케나우어는 199쌍의 신혼부부를 대상으로 상대에 대한 '지식(knowledge)'과 상대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가 관계에서 어떤 차이를 갖는지 연구했다. 『이해하는 게 지식보다 중요하다』Understanding Is More Important Than Know ledge 라는 주제의 이 연구 발표에 의하면 상대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보다 '이해한다고 여길 때' 관계의 안녕 상태는 훨씬 오래 지속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렇게 오래 본 배우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걸까?
감성지능 연구자 트래비스 브래드베리(Travis Bradberry)는 사람은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하루 평균 400회 가량의 감정이 오가는 것을 경험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매 순간, 끊임없이 지나치는 감정을 처리하며 하루를 살아낸다. 빡빡한 일정을 살아내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감정을 충분히 필터링하며 하루를 보낸다는 건 불가능하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는 내가 툭툭 튀어나와 당황하는 일이 다반사다. 숨 가쁘게 오가는 감정들에 반응하는 '내 속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랫말처럼 나조차도 나를 정확히 이해하기 어려운데 타자가 나를, 또 내가 너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므로 내가 배우자를 '안다고 오해하는' 시점부터 불통은 시작된다.

'타자는 나의 지식으로 환원될 수 없다'라고 했던 프랑스의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처럼 배우자의 과거를 알고, 습관을 알고,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말까지 속속 안다고 '오늘의 그 사람'을 단정 짓지 말자.
그렇다면 늘 거울처럼 마주 보는 배우자와 어떻게 원활한 소통을 할 것인가?
첫째 : '나-그것(I–It)'에서 '나-너(I–Thou)'의 관계로 회복할 것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라고 했던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대상과의 관계를 '나-너(I–Thou)'와 '나-그것(I–It)'으로 명명했다. 여기서 '나와 그것'의 관계는 내가 상대를 사물로 보고 이용하고, 규정짓는 관계로 대상과의 관계에서 늘 손익을 계산하는 것이다. 반면 '나-너(I–Thou)'의 관계는 상대를 어떤 기능으로 규정짓지 않고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며 의미를 부여하는 관계다.
둘째 : 대가를 잊어라

청년 시절에 이미 사랑의 본질을 꿰뚫었던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며 "Love is an activity, not a passive affect", 즉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능동적 행위란 다시 말하면 상대가 내게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내가 주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에 주고, 받았던 상처건 선물이건 모두 잊고 다시 '준다는 행위'를 제대로 배워보자.
셋째 : 함께한 시간이 축복임을 잊고, 당연시된 타성을 일깨울 것

시간의 타성에 젖어 언제부터인지 배우자를 자신도 모르게 '그것'으로 대하고 있었다면 타성의 먼지를 탈탈 털어 '나와 너의 관계'로 시작했던 처음으로 돌아가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러려면 서로의 시간이 당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 또 부부 스스로 함께 지켜온 '오랜 시간에 권위를 부여'하는 환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넷째 : 한나 아렌트의 '복수성'을 이해하라

'상대방의 내면세계에 들어가 그 사람이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것'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인간은 어느 한 사람, 똑같을 수 없다. 나와 다른 그의 세계에 접속하는 것이다. 그때에야 비로소 배우자에 대한 존중 근력이 키워지고 절대로 선을 넘지 않을 '예의 있는 친밀감'이 지켜진다. 배우자는 모든 게 나와 같아야 한다는 편의성의 착각 속에 무엇보다 중요시해야 할, 다름의 존중, 그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는 사람'이기에 앞서 여전히 '앞으로도 알아가야 할 사람'으로 배우자를 인식할 때 다시 건강한 관계성을 회복하며 심리적 거리를 좁힐 수 있다. 무엇보다 상대를 다 알게 됐다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변화해 온 서로를 곁에서 지켜본 '특별한 관계성'을 높이 사는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따라서 부부에게 지금 필요한 건 관심을 담은 질문, 즉 서로의 '현재'를 다시 묻는 힘이 필요하다.
"잘 잤어?"
"오늘 하루, 당신은 어땠어?"
먼 곳에 있는 누군가에게가 아닌 내 곁의 배우자에게 다정히 질문해 보라. 당장 부부 관계에 생기가 돌 것이다. 그러면 '우리, 관계를 철회할까?'라는 말 대신 '무엇이든 함께 하고 싶은 서로'가 될 수 있다.
매일 밤, 동네 한 바퀴를 '오늘 뭐 했는지'를 깨알같이 주고받으며 하루도 빠짐없이 40여 년간 산책했다는 저서 『빗자루 타는 삐삐 할머니』의 조영숙 작가 부부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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