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도에 의해 강제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자기 인생에서 몇 살까지 직업노동을 수행하는 것이 적절할까? '노동과 소득 보전'이라는 좁은 틀에서만 은퇴와 정년을 바라보는 정년 연장이나 노인 일자리 사업 담론과는 달리 우리는 좀 더 폭넓은 의미에서 정년을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정년이 연장되어 소득 공백을 채우고 직업 세계에 잠시 더 머무른다고 해서 인생 후반기의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법적 정년 연장과 일자리 창출이 소득 보전에 도움은 되겠으나, 여기에만 매몰되면 "일을 해야만 존재 가치가 있다"는 낡은 문법에 갇히게 된다. 이 문법은 인생 후반을 맞이한 이들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직업노동을 통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입증할 수 있다는 노동 중심 담론이야말로, 노골적인 형태이든 "어르신, 이제 집에서 쉬셔야지요"와 같은 온화한 형태이든 노인 폄하를 지속해서 재생산하는 원천이기 때문이다.
버트런드 러셀은 1932년 발표한 에세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에서 이 문제의 뿌리를 정확하게 짚었다. 러셀이 보기에 현대 사회는 노동을 미덕으로, 여가를 죄악으로 가르쳐왔다. "노동은 선이고 게으름은 악"이라는 믿음은 종교적 확신에 가깝다. 우리는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습관처럼 직업을 대답하도록 훈련받았다. 정체성을 구성하던 유일한 요소인 직업이 사라지는 순간, 인생 후반기의 인간은 깊은 혼돈을 겪는다. 은퇴 후 찾아오는 공허함의 실체는 돈의 부족이 아니라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의 부재다. 러셀은 이 공백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 공백이야말로 인류가 오랫동안 박탈당해온, 사유하고 즐기고 창조하는 시간을 되찾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50-60대는 러셀의 진단이 가장 선명하게 들어맞는 세대다.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이들에게 일은 생존의 수단이자 정체성의 전부였다. "바쁘다"는 것은 훈장이었고, "쉰다"는 것은 변명이 필요한 일이었다. 평생 그 문법에 익숙했던 사람이 준비도 없이 그 규칙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로 내던지는 게 은퇴다. 그런 의미에서 은퇴는 단순한 직업에 종사하는 시간이 끝났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규정해 온 언어가 사라지는 경험이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노동 없이도 나는 누구일 수 있는가?"
"평생 동안 장시간 일해 온 사람이 갑자기 일을 하지 않게 된다면 따분해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상당한 양의 여가 없이는 최상의 많은 것들로부터 차단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같은 박탈을 겪어야 할 이유는 이제 더이상 없다."
-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한나 아렌트는《인간의 조건》(1958)에서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세 가지로 구분했다. 아렌트는 노동은 생물학적 생존을 위한 반복 활동이라 정의했다. 작업은 집을 짓고, 책을 쓰고, 도구를 만드는 것처럼 지속적인 산물을 만들어내는 활동을 의미한다.
아렌트가 가장 높이 평가하며 인간의 조건을 구성한다고 강조한 활동은 노동도 작업도 아닌 '행위'다. 행위는 타인과 함께 공적 영역에 참여하는 활동이며, 말하고 설득하며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다. 아렌트가 보기에 현대는 노동의 논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다. 효율과 생산성이 인간 활동의 유일한 척도가 된 세계에서 '행위의 공간은 점점 좁아진다. 은퇴는 인간 활동의 세 축 가운데 '노동'이라는 한 요소의 공백을 의미할 뿐이다. 직업노동에 삶 대부분을 내어주느라 멀어졌던 작업과 행위의 영역을, 노동에서 벗어난 은퇴의 시간에 이르러 삶 전면에 복원할 기회가 열린 셈이다.
"근대는 이론적으로 노동을 예찬했고 결과적으로 모든 사회를 노동 사회로 변형시켰다.
소원은 동화에서처럼 소원 자체가 좌절되고 실패하는 순간에 이루어진다.
노동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은 노동자 사회다.
그런데 이 노동자사회는 해방을 위해 투쟁할 만한 가치가 있는 더 높은 차원의 더 의미있는 활동을 알지 못한다."
-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아렌트는 인간을 '시작하는 존재'로 정의했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능력, 즉 스스로의 의지로 예측 불가능한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는 역량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보았다. 노동의 세계는 이 능력을 억압한다. 노동은 반복을, 조직은 예측 가능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그 요구에 성실히 응해 온 50-60대는 실상 가장 인간다운 능력을 오랫동안 유예해 온 사람들이다. 아렌트의 시각에서 은퇴는 상실이 아니다. 생애 최초로 노동의 논리 바깥에서 진정한 행위를 시작할 수 있는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행위는 결코 거창한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동네 모임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 미뤄두었던 글을 쓰는 것, 젊은 세대와 대화하는 것, 지역 공동체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노동의 세계에 머무는 동안 뒷전으로 밀려났던 이 모든 사소한 실천이 곧 아렌트가 말한 행위다. 노동이 생존과 반복의 논리라면, 행위는 시작과 의미의 논리다.
러셀이 노동 중심 문화의 허구성을 해체했다면, 아렌트는 그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워야 하는지 알려준다. 쉼을 죄악시하는 문화에서 벗어나 사유와 여가의 시간을 되찾고, 그 시간을 노동이 아닌 행위로 채워 넣는 것. 이것이 인생 후반부가 우리에게 던지는 진짜 과제다. 노인 일자리가 아니라 '노인 행위의 공간'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이것이 고령화 사회가 마주해야 할 본질적인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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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업은 교수, 부업은 동네 책방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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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화 10:30,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 1A교육실)

